나에게는 천개의 서랍이 있다-이은옥 시인
페이지 정보
본문
나에게는 천개의 서랍이 있다
이은옥 시인
오래 묵혀놓았다 끄집어 낸 사유가 깊은 시편들
강동수시인
한 때 서점의 맨 앞줄을 차지하던 시집들이 구석으로 밀려난 시대에도 시인들은 꾸준히 시집을 발간한다. 어쩌면 시집이 꾸준히 팔리던 시절보다 더 많은 시집들이 출간 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시인은 가난하다는 고루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지금은 다들 형편이 좋아져서 시집정도는 자부담으로 발간할 수 있기에 그럴 것이고 또는 문예창작지원금을 받아서 발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매달 문예지를 통해 양산되는 시인이 넘쳐나기에 시집 한 권은 가지고 싶은 욕망이 이렇게도 많은 시집이 넘쳐나게 만들지 않았는가 생각해본다. 등단하자마자 시집을 출간하는 시인이 우리주위에도 흔한 작금의 세태에 199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등단하고 23년 만에 시집을 발간한 이은옥시인은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한다 하겠다. 그러기에 이은옥시인의 시집에는 오랜 세월 묵혔던 고향집 장독대에서 익어가던 장맛처럼 은은한 사유의 깊이게 시편마다 스며져있다
또 메스꺼운 가을이지요 탱자나무 울타리에 벗어놓은
어머니의 안부 바람에 말려가고 개미들 집 짓느라 분주한
마당이지요 대숲에서 바람이 한꺼번에 몰려와 감잎들을
몰고 가을은 가지요
마당에 담장처럼 서있는
모과나무 감나무 은행나무 석류 대추 살구나무
오십년이 넘는 나무들 게워내는 소리에
문득문득 잠을 설쳐 마루에 나 앉은 밤
미루나무에 달이 걸려있는 밤
아버지 기침소리가 마당을 걸어 다니는 밤
파도소리가 선명하게 몰려오는 밤
언어들이 몰려오는 전투적인 소리
오래된 능금나무가 세월의 두께를 씻고 서 있지요
동막집에도 그리운 사람은 보이지 않아
대문을 열어놓고 새를 기다리지요
- 『동막』 전문
동막은 강원도 삼척시에서 20여분 차로 달려가야 하는 산속에 자리한 시인이 자라던 고향의 지명이다 한때 동막골이라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였는데 영화에 나오는 동막골과 같은 지명으로 불리는 동네이나 다른 곳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찾은 고향에는 세월의 두께를 씻고 능금나무며 모과나무 감나무들이 담장처럼 서있고 그리운 사람이 떠나고 없는 빈집에서 어머니의 안부며 아버지의 기침소리를 다시 떠올린다. 시인은 시집 속 여러 편의 시에서 고향을 유년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고향은 늘 기분이 묘해지는 마약 같은 열매 같아서/ 흠뻑 취하고 왔지요 /공기에 취하고 바람에 취하고 바다에 취하고 눈발에 취하고(붉은 벽) 마당 안에 기와집, 벽에 기대 서있는 삽, 바퀴가 멈춘 리어카, 기역자로 걸려있는 낫과 호미, 새들의 발자국을 지운 싸리 빗자루(숨은 그림 찾기) 똑같은 벽지의 무늬를 세면서 잠들었던 유년의 구름이 울렁거렸다/ 햇빛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벽은 늙고 있다(단초)
국도에서 ,
마을에서 풀어놓은 검정개 한 마리
도로를 가로질러 천천히
어스렁 꽁지를 감추고 눈빛이 주인 잃은 개 눈빛이다
검정개와 아이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무심한 얼굴이다
엄마는 집에 없다 아빠도 집에 없다
아버지는 허리띠 맨 마지막 구멍에 삶을 채우고
외출했다
허리띠 구멍마다 헐거워진 세월의 흔적이 남아,
한 칸씩 안쪽으로 들어올 때마다 삶도 점점
안쪽으로 기울어 졌을까
벗어 놓은 허리띠가 늘어져 못에 걸려
삶이 식어 있다
아버지의 삶은 어디까지 왔을까
아버지가 마련한 아랫목은 얼마나 따뜻할까
빈 방, 햇살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간다
벽에 걸린 액자 속의 사진 속에서 먼저 죽은
얼굴들이 웃는다
그 옆에서 나도 웃고 있다
.
.
중략
다들, 어디로 갔을까
검정개는 무얼 기다리는 것일까
-『검정개』 부분
지방도시의 붕괴는 인구감소로 이어지고 도시로 떠난 시골 동네는 빈집들이 늘어만 간다 언론은 앞 다투어 향후 인구감소로 인하여 소멸될 도시를 그래프로 나타내고 있다 우리보다 일찍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일본은 약 50%의 기초단체가 2040년에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도 30~40년 후에 인구가 소멸할 위기에 처한 기초단체는 80여곳에 이른다. 이은옥 시인이 자란 고향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시 찾은 고향은 빈집들만 늘어나고 생활고로 아이를 돌볼 여력이 없는 현실에서 혼자 집에 남아있는 아이의 처지를 주인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개 한 마리에 대비시킴으로 시의 긴장감을 살리고 있다 마루에 걸린 액자 속 식구들을 모두 웃고 있다 비록 가난하고 힘든 시기였지만 식구들이 모두 한 상에 앉아 밥을 먹고 형제의 우애를 다지던 그 시절이 어쩌면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그 옆에서 웃고 있는 시인처럼. 햇살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빈방처럼 다들 떠나버린 곳 , 고향은 언제나 그리움으로 남는 것
오래된 친구가 찾아왔다 황무지처럼* 오래된 옷을 걸쳐
입고 지하 엘리베이터에 앞에 서 있었다 지하식당에서 우리
는 백반을 먹고 오래된 예기들을 놓았다
아직도 투명성이 없는.
답도 없는 전투적인 예기들을 나누며
지하에서 오래오래 검은 커피를 마셨다
친구의 일기에서 폭력은 사라지고
등잔불 같은 눈, 암전된다
신발 안에 가득한 먼지를 털며 마당 안이 세상인
고향에 사는 부친의 안부를 묻는다
이제 그곳에는 연어가 오지 않아
아주 오래된 고가구 같은 친구 곁에서
오래된 먼 사람들의 예기와 말들이
지상과 지하를 넘나들었다
일가친척들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이
동해바다 해일처럼 일어섰다
봄, 이쯤에 고향의 느티나무 순처럼
우리는 또다시 도시의 불빛에 합류했다
십 년 전의 옷을 걸쳐 입고 온 친구 곁에서
이십년 전쯤의 동막리를 생각했다
저 수족관 속 열대어가 눈부시다
더운 달 하나가 지하로 들어와 저녁을 흔든다
*양희은의 <두리번거리다>에서 차용
-『오랜만에, 아주 오랫동안』 전문
이은옥 시인은 오래 전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하며 아주 가끔 고향 삼척에 다녀간다. 고향의 문학단체인 두타문학회에 같은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이은옥 시인을 만난 지가 거의 없었다. 수개월 전 매월 열리는 시낭송회에서 만났을 때 조용히 시낭송을 들으며 모임 후 뒤풀이를 마다하고 떠났다 시인은 지금 세련된 도시에서 고가구같이 오래된 고향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신다 고향 동막리를 다녀온 지도 20여년 오래된 친구에게 오래된 예기를 들으며 옛사람들의 안부를 묻고 해일처럼 밀려오는 그리운 얼굴들을 추억하다 또 그렇게 헤어질 것이다 지하에서 커피를 마시며 바라보는 눈부시게 빛나는 수족관속의 열대어는 젊은 날의 시인의 모습일지도.
구 층 창가 책상 기왓장에 얹은 폐타이어들을 세면서
공적생활이 시작됐다 타이어 무게로 바람을 견디던 내
수동 기와촌이 헐리고 경희구의 아침단지가 들어섰다 동
아일보 청사가 리모델링하고 코리아나 호텔 전광판에는 새
로 바뀐 조선일보 로고가 빛났다 청계천이 흐르고 8도의
물을 합수하는 장면을 직접 보는 행운도 있었다 외교통상
부와 정부종합청사 빌딩이 들어서고 간간이 공원에서 직
원들과 한낮에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간극』 부분
시나브로 가을 2003년 11월의 첫째 일요일 시위대들이
빠져나간 시청 앞 광장에는 검은색 근조 리본들이 황금색
은행잎들과 나뒹군다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사람들이 커
피를 마시며 광장을 구경하고 있다 시청역 지하도 광고판
에서 김중만이 카메라 앵글을 맞춘다 노숙자들이 나뒹굴
었다 신세계백화점에는 연말 트리 장식 불빛이 흔들렸다
롯데백화점은 문을 닫았다 남대문에 핀 무궁화 꽃씨들이
하늘에 펴졌다
-『광화문에서 한강대교를 지나 상도동까지』 부분
서울의 중심가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담담히 일상을 펼쳐놓은 시편들은 여느 직장인들과 다름없는 일상이다 일기를 쓰듯이 써내려간 시편에는 개인의 역사요 우리의 역사가 남겨져있다 빈집들만 남아 바람이 통과하는 쇠락하는 고향마을과 다르게 이곳 서울의 중심지에서 바라보는 풍경들은 하루가 다르게 화려하게 변해간다 기와촌이 헐리고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고 새롭게 리모델링하여 얼굴을 바꾸는 빌딩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제 시인은 오랫동안 근무하며 직접 간여한 이백 칠십여 권의 책표지를 기억하며/ 이십이년을 청산하는 결재란에 선명하게 도장을 찍든 오후(간극)을 추억으로 남겼다 어린왕자가 별을 청소하고 에펠탑이 눈보라 속에서 지구를 돈다/ 샌디에이고 비치에서 돌고래가 하늘은 난다/ 뉴욕자유의 여신상 머리위에 함박눈이 내리고/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바다에 떠 있다(스노우볼) 스노우볼처럼 일상에 갇힌 생활이 끝이 나고 조금은 한가해졌을 시간들 이제 짐을 풀고 그의 항아리 안에서 잠들고 싶은 오후/ 낙타를 몰고 도착이나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한 아주 멀리 가는 티켓을 구입하고 싶은 그런,(간이역)날들을 이제 실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책등을 덮고 청동거울을 닦는 손을 놓고 추수를 끝낸 사람들처럼 언어의 축제에 합류하리라 그리고 구름에 기대 그대의 이름을 호명하리라는 시인의 말처럼 조금은 여유롭게 지내면서 주옥같은 시편들을 들고 다시 나타나길 기다려봅니다
여기 한편의 수채화를 보는듯한 이은옥시인의 경향신문신춘문예 당선작인 『어성전의 봄』을 옮겨놓습니다
적송과 잡목이 어울려 몇 겹의 산봉우리가 되고
마루 끝에 서서
잘 보이는 앞산부터 산의 허리를 센다
겨울 내내 쌓여있던 눈이 아래 마을부터 녹기 시작하여
산 밑에 있는 기와집 근처 응달까지 길어진 해 그림자가
봄을,
마당까지 실어 나른다
서서 말라버린 국화 밭에도 햇살이 옮겨 다니면서
겨울의 냄새를 말린다
겨울 내내 눈 속에 파묻혀 있던 국화 밭이
밭고랑을 드러내고
강이 얼 때부터 녹기 시작 할 때 까지 마을은 고요하다
나는 고요하다
고요가 고혹적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봄,
고기들이 알을 까고 돌 밑에 집을 만들 것이다
산을 끼고 도는 어성전의 강, 강물의 흐름이 좋고
조용하여 고기들이 많이 사는 강,
사람들은 이 마을을 어성전 漁盛田* 이라 한다
바다가 바다사람들의 밭이라면 강은 고기들의 밭이다
아침안개가 지나갈 때는
이곳 마을 사람들의 옷에서 강 냄새가 난다
가끔씩 마을은 안개에 푹 잠겨있고
새벽, 닭이 한집 한집에서 울기 시작해
온 동네는 조그만 소리들로 하루가 시작된다
방문을 열면 안개가 먼저 들어온다
햇살이 온 마을에 퍼지면 나는 마음을 서두른다
봄, 햇살이 동반하는 이 나른한 계절은
앉아있기도 불안하다
겨우 내내 쉬고 있던 농기구들이 하품을 하고
아버지는 먼 산에서 해 온 풀푸레나무 자루를 다듬어
건너 마을에 쟁기를 벼르러 간다
아버지는 조율사처럼
호미자루며 도끼 자루 괭이자루를 다시 갈아 끼운다
농기구들은 아버지의 건반이 되어 사계가 시작된다
나는, 슬그머니 강으로 나가본다
강은 아직 고요하다
강은 누가 먼저 알을 낳았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어성전의 봄』 전문
- 이전글도로시 파커를 위하여-김경미 시인 21.11.1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