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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김경성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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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동수
댓글 0건 조회 79회 작성일 22-01-20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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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

                 -김경성 시인

 

자연과 소통한 은밀한 내력

                           

 

 

 

 

              강동수(시인)

 

 

프라하-

김경성시인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이다 체코의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는 김경성시인이 사랑하는 도시이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이기도 하다 가끔 문학적인 일로 소통하려고 전화하면 외국의 어느 도시이거나 국내의 여러 곳으로 다니는 중 일 때가 많다 첫 번째 시집 와온에 이은 두 번째 시집에도 여행에서 느낀 감정을 시적으로 깊이 있게 풀어낸 흔적들로 채워져 있다 서해안 바다인가 했더니 몽골의 초원이고 다시 셀랭게티 초원을 거쳐 어느새 시인의 눈은 노고단정상에 올라가 있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시인이 그동안 소통한 자연과의 은밀한 내력이다

 

 

1

서고의 열쇠를 잃어버렸다

바다에 빠뜨린 열쇠를 찾으려면 아침을 기다려야 한다

 

초승달이 바닷물에 옅은 빛을 내려놓을 때 바다는 초승달

빛만큼의 길을 물위에 그려놓았다

 

새벽안개가 바다 안쪽까지 감싸 안은 팔을 풀어놓자 거짓

말처럼 서고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 읽다가 접어놓고 간 책을

펼치니 흠뻑 젖어 있다

 

별들이 사산한 불가사리가 책꽂이 아래에 떨어져 있다 무

엇을 움켜쥐고 있었는지 불가사리의 다섯 손가락이 아직도

구부러져 있다

 

끝이 아니라고 잠시 뒤돌아 나가는 썰물의 끝자락을 움켜

쥐었지만 나는 끝내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습한 서고에 앉아

서 읽지 못하는 상형문자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톡하고 어깨를 치고 가는 바람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주저

앉아

한 생애를 다 보낼 것만 같았던 봄날이었다

 

2.

길을 접어서 몸속에 말아 넣은 소라는 모래바닥에 엎어진

채 구겨진 길을 풀어서 바다로 밀어내고 있었다

괭이갈매기들은 동백꽃잎 무늬가 있는 부리를 연신 모래

속에 묻었다가 꺼내더니 바다 쪽으로 날아갔다

백사장에 흩어져 있는 새들의 말과 책 속에서 흘러나온

말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저릿한 말들이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 온몸 가득히 느껴지는 오르가즘

화라락 불붙듯이 한꺼번에 서고를 덮치는 해일

속수무책이다

-오래된 서고 (격포 바다) 전문

 

 

시인은 지금 전라도 변산의 격포 바다에 있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 미명의 시간. 아침안개가 해변의 풍경을 감추고 있고 마침내 안개가 걷히자 눈앞에 펼쳐지는 장엄한 바다는 한편의 서고가 된다 썰물에 드러난 불가사리는 책꽂이 아래에 떨어진 사산한 별이 되고 모래바닥으로 밀려난 소라는 길을 접어서 몸속에 말아 넣고 있다가 바다로 가기 위해 구겨진 길을 풀어내고 있다 동해의 바다는 일시에 일어나는 큰 파도가 자주 밀려와 해변을 남김없이 휩쓸어가지만 서해는 밀물과 썰물이 넘나들며 동해안과 또 다른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면 불가사리가 어찌 밤새 사산한 별이 되고 소라의 몸속이 구겨진 길이 되겠는가 이것은 상상이 아니고 일출을 맞이하러 바다에 서 본 사람만이 느끼는 감흥이다 화가는 그림으로. 사진가는 사진으로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표출하지만 시인은 또 다른 느낌과 새로운 시각으로 아침바다를 펼쳐놓고 있다 찬찬히 시 한편을 읽는 것만으로도 서해바다는 눈앞에 이야깃거리가 많은 바다의 잔해를 펼쳐놓는다 시간에 순응하는 바다가 해일처럼 해안선을 끌어당겨 화라락 불붙듯이 육지로 밀려오면 드넓은 서재에 꽂혀있는 책들이 젖어든다 속수무책이다 이것은 당신이 언젠가 보았던 바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바다를 다시 들여다보는 시인의 서재이다

 

 

 

 

 

끓어진 전선을 목에 걸친 전봇대, 백사장에 발목을 묻고

있다

전선을 타고 지나다니던 오래된 말들이 길 위에 떨어져 있다

 

떨어져서 굴러다니던 말들은 전봇대와 전봇대를 넘나드는

새들의 몫이다

먼 곳의 소식도 그의 몸을 타고 흘러왔고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들은 선단여 까지 갔다가 되돌아

왔다

 

지금 남아있는 새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그때의 새가

아니고

그때의 물이 아니고

지구를 수만 번 돌다가 온 바람만이 그대로일 뿐,

 

공룡이 발톱을 세워서 써놓은 유적은 느다시 구릉에서

흘러나온 빗물이거나

암벽 사이로 고개를 내민 금방망이 꽃이라고

물고기가 산란하는 동안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목기미해변에 얼굴을 묻은 닻들은 농염한 바닷물에 녹꽃

이 피고

이따금 목에 걸려드는 해초는

등지느러미가 아름다웠던 물고기의 말을 전해주었을 것이

 

통보리사초밭에 부리를 묻은 검은머리물떼새

살아 숨 쉬는 것들의 뜨거움이 목기미해변을 따라 흘러 다

니고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발자국이 그물처럼 드리워져 있다

 

닻의 그림자를 재며 생의 농도를 읽는 목미기해변

낡은 전봇대도 모래 구릉에 닻이 된 채

전선을 타고 흘러갔던 것들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목기미해변에 닻을 내리다 전문

 

 

 

여기 서해 굴업도 동쪽에 있는 목기미해변에서 전선을 붙들고 서있는 전봇대는 많은 이야기를 주워 담고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전봇대는 전선을 목에 감고 서있지만 지금 바다를 날아다니는 새는 새롭게 태어난 새들이고 먼 길을 돌아온 바람만이 이따금 전봇대에 걸려드는 해초와 함께 이곳을 외롭게 지키고 있다 한 때 사람들로 북적였을 해변에는 젊은이들이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는 서해바다의 굴업도. 섬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마을을 지키고 있는 낡은 전봇대와 새를 대비시킴으로 전선을 타고 지나다니던 오래된 말“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발자국과 같은 표현으로 시간의 간격을 나타내고 있다 목기미해변을 안고 있는 굴업도는 두 번의 큰 홍역을 치렀는데 1994년 정부에서 핵페기장 후보로 지정하였을 때와 2005년 대기업에서 골프장을 비롯한 호텔과 콘도를 짓겠다고 나섰을 때다 핵페기장은 반대할 주민이 없는 굴업도 대신 이웃의 덕적도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와 활성단층이 발견되면서 1년도 안 돼 지정이 취소되었고 섬 전체를 사들인 대기업의 개발계획은 섬의 훼손을 우려한 환경단체의 반대에 부딪치자 인천시는 골프장건설을 뺀 사업을 권고했고 대기업은 2014년 골프장건설을 백지화하였다 두 번의 큰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진 섬은 전 세계에 1만 마리 정도 남아있는 멸종 위기 종 검은머리물때새와 천연기념물인 매와 황새 황구렁이와 먹구렁리등이 살고 있는 자연의 보고이다 목기미해변을 품고 있는 굴업도가 언제까지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우리 곁에 남아있기를..

 

 

 

최초의 사람이 걸어갔던 길 위에 야크 떼가 서 있다

야크의 눈에 들어간 설산이 높다

빙하기의 시간이 해체되는 순간이다

 

더러는 뿌리까지 뽑혀서 올라오는 마른풀을 되새김질하며

따뜻한 젖으로 사람들의 심장을 어루만진다

 

맨발로 서 있는 설산은

수백 겁 설층으로 바다의 경계를 지워가며

그 속에서 새어나오는 눈 녹은 물로 침묵하고 있는 것들을

풀어내고 있다

 

부화하지 못했던 나비의 성층이 막 날개를 펴는 이곳이

수억 년 전에 바다였다는 풍물이 들리기고 했다

 

너와 내가 만나 억만 겁의 시간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나비와 꽃씨의 말을 다 듣지 못하고

경계를 지우는 거미줄에 일생을 걸고 무늬를 짜는

이슬방울을 다 세지 못했기 때문이다

 

흰옷 입고 빙하기를 건너온 당신

조금씩 제 몸을 녹여 써 나가는 ,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젖은

말들

야크의 몸속에서 첫말이 되어 뭉클거린다

 

라마승이 내어주는 수유차를 마시다가

금이 간 찻잔에서 흘러내리는 야크의 눈물을 보았다

 

-야크의 눈물 전문

 

 

네팔 혹은 티벳 어디쯤에서 만난 야크를 바라보는 시인의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시편을 읽어 내린다 고산지대 척박한 설산에서 마른풀을 뽑아 올리는 야크는 따뜻한 젖으로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수 백 겁의 세월을 지나 이제 시인 앞에 나타난 설산은 조금씩 자신의 몸을 녹여 세월을 풀어내고 있다 젖은 말들을 빙하기를 건너온 만년설 혹은 억만 겁 세월의 인연으로 만난 당신. 둘레 사방 40리 되는 바위 위에 백년마다 한 번씩 하늘에 선녀가 내려와, 그 위에서 춤을 추는데, 그때 선녀의 얇은 옷으로 스쳐서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세월이 1겁 이라면 억만 겁 세월은 얼마나 긴 인연인가 그것이 수억 년 전 바다였을지도 모를 이곳 만년설이거나 지금 만나고 있는 당신이라면 사람과 사람의 인연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야크의 젖으로 데워진 수유차를 마시며 맨발로 서서 빙하기의 물로 목을 축이던 야크를 생각한다. 시인의 바라보는 금이 간 찻잔은 야크의 눈물. 시인은 언제 어디서나 사물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바닷길을 찾고 있는 눈이 흑요석 빛이다

 

태풍의 눈이 바닥까지 들여다보며 방점을 찍을 때 마다

몸에 그어지는 사선으로 바닷속 길을 읽었다

 

온몸이 물결에 함몰되어 심하게 흔들려본 적 있는 사람만이

그의 몸을 열고 내력을 꺼내볼 수 있다

 

어떤 것은 독화살을 제 몸에 박아놓은 채

잘 익은 바다가 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물고 다녔던 바다를 쏟아내며

제 속까지 다 보여준다

바다를 끌고 다녔던 지느러미가 숨 고르기를 하는 용대리

황태덕장

수만 개의 꼬리지느러미에서 아직도 바다가 출렁인다

 

아 가리 가득 눈꽃을 물고

꼬리지느러미를 세차게 흔든다

이내 녹았다가 얼었다가 하는 사이

꽃은 지고 또 피어날 것이다

 

흑요석 화살촉이 황태 눈 속에 박혀있다

출렁이는 바다 위에 붉은 꽃들이 가득하다

 

-시위를 당기다 전문

 


강원도 인제군에 있는 황태덕장은 전국 황태의 70%를 담당하는 최대의 명태건조장이다 명태는 바다에서 잡은 생태를 겨우내 얼려서 말린 것을 일컫는데 잡아서 바로 꽁꽁 얼린 것은 동태라 부른다. 거진이나 인근 바다의 할복장에서 할복을 한 후 이곳으로 실려와 몇 개월간 눈을 맞으며 얼어다 녹았다를 반복해야 비로소 가치 있는 상품이 된다. 수만 마리가 얼렸다 녹았다 하는 황태덕장에서 시인은 아직도 출렁이는 바다가 보인다. /사막에서 집들은 고래가 되어 누워있다(유목의 시간) /기억의 집을 찾아서 하루에 두 번씩 오는 고래가 있다(풀등) 이따금 밑줄 긋고 가는 물고기가 없다면/ 문장을 이어가지 못할 것이다(추전역) 한 생은 마을 담장 옆에 살았으니 또 한 생은/물속 길의 지도를 그리는 물고기의 눈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했다(한쪽 어깨에 반달무늬가 있는)처럼 김경성 시인은 사막에든지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는 곳에 위치한 태백의 기차역에서도 저 바다 밑 물고기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시인의 저력을 가졌다 꽃이 피고 지고 반복하는 사이 명태도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최상품이 될 것이고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영국 속담처럼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굴곡이 있어야 성숙된 인간성을 갖추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할복은 대체적으로 여인네의 차지, 온 몸이 물결에 함몰되어 흔들리는 사람은 바닷가에 터 잡고 사는 우리네 어머니이다 한때 동해안에서 흔하게 잡히던 명태는 장비의 발달과 중국어선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수입 산이 아니면 동해에서 명태는 찾아보기 힘든 생선이 되었다

 

 

낡은 자전거 한 대가 체인을 풀어 놓은 채 생각에 잠겨있다

 

해진 의자 사이로 보이는 그의 등 가운데 움푹 들어간 상처

의 흔적이 있다

 

그가 지나온 길은 이미 화석이 된 지 오래. 더는 길의 맥을

짚을 수 없다

 

제 속에 접어놓은 길을 펼치면 지구를 몇 바퀴나 돌 수 있

을까 별까지 닿을 수 있을까

 

그중에 가장 오래된 길 하나를 꺼내자 스르르륵 먼지를 일

으키며 신작로가 흘러나온다

 

다시 또 길 하나를 꺼내자 둥글게 말린 길이 떼구르르 굴러간다

언덕위에 늙은 팽나무를 한번 감고 간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곧 시작이었다는 것을 풀어진 체인이

말해준다

수많은 길의 흔적들

겹쳐진 길마다 다른 기억의 무늬를 가지고 있다

체인을 끼우는 순간, 자전거는 새로운 길 하나를 바퀴에

감기 시작하더니 덜커덕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내 속에 접어두었던 길을 꺼내본다

수십 번 넘어졌다가 일어서기도 했던, 되돌아가며 주저앉

기도 했던

웅덩이와 낭떠러지가 있는

 

나에게로 가는 가장 먼 길 초입에 막 들어섰다

 

실타래 같은 길을 문 새떼가 내게로 오고 있다

 

-먼 길 전문

 

 

여기 녹슬고 체인이 벗겨진 고물 자전거가 있다 사물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 보일 것이다 자기에게 필요한 부품을 가져가겠다거나 고철로 처분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금전적으로 계산이 앞세우는 사람이지만 시인은 자전거가 달렸을 기나긴 길을 시인의 눈으로 풀어보는 것이다 그 길에는 먼지를 일으키며 신작로를 신나게 달려 나가고 언덕을 힘겹게 올라서서 팽나무를 한 바퀴 돌아 달렸던 수많은 흔적이 있다 이것은 시인이 바라보는 또 다른 우리네 인생길이기도 하다 한때 젊음을 달고 수십 번 넘어졌다 일어서기도 했던 당신과 나, 그러나 이제 먼 길을 돌아 고요히 침잠하며 인생을 되돌아보는 나이, 생생하던 다리도 힘이 빠지고 어디 한쪽 불편해진 육체는 늙은 자전거를 닮아있다 웅덩이와 낭떠러지 같은 세상이지만 또다시 걸어가야 할 남은 길이 있다 누구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되는 먼 길의 초입에서 실타래처럼 아직도 풀어야할 숙제를 안고 인생의 먼 길을 오늘도 걸어가야겠다. 김경성 시인은 /오동나무 통꽃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날 /나는 맨발이었다 () 길을 따라 걸어가면 달의 문에 닿을 수 있을까/휘청거리며 산길을 걸었다/ (노고단 가는 길)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서 있고 싶네/ 오래된 느티나무 그림자 끝나는 곳(가을 숲의 숨)처럼 바다나 산과 같은 자연 속에 스스로 동화되어 경계를 풀어내는 힘이 있다 그 속에서 여성특유의 따뜻한 감성으로 사물에게 의미를 심는 작업을 마다않는다 여행에서 직접 체험한 시들을 시집 속에 담아내고 있다 시 한편을 쓰는 일이 혹은 한권의 시집으로 시인의 내력을 다 안다는 것은 어쩌면 /생각의 언저리를 물어다가 마음의 중심에 갖다 놓는 일/ 내가 당신을 알아가는 것만큼이나/ 더디고 더딘 일이었다/(검은 부리리에 관한 기억)처럼 힘들고 더딘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여행에서 건져 올린 김경성 시인의 시 한편을 실으며 조금이나마 시인의 마음을 읽어본다. 김경성 시인은 지금 인도를 여행중이다

 

 

 

떠나는 것들은 그 사연조차 말하지 않는다

다만 바람이 불어가는 쪽으로 비가 긋고 가는 길을 따라

흘러갈 뿐

어제는 비가 와서 꽃이 피었고, 꽃을 먹은 양떼는 넘치도

록 젖을 내어 주었다

문을 열고 바람을 들인다

몸속에서 키우는 숲속 나무가 잎을 편다

 

해와 달이 둥근 창으로 드나드는 사이

초경을 건넌 처녀는 제 몸속에 아이를 들이고

건너고 또 건너서 닿은 구릉너머에서는

말을 타고 달리던 청년이 입안에 고인 침으로

새들을 키운다

높이 나는 새들이 먼 곳에서 부는 마른 바람의 서걱거림까

지 그대로

청년의 입속에 넣어준다

 

사막에서 집들은 잠들은 고래가 되어 엎드려있다

고래뱃속에서 자라는 나무가 한꺼번에 몸을 포개는 지느

러미를 흔들어댈 때

고비 사막에서는 물 흐르듯 몇 마리의 고래가 앞으로 나아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목의 시간은 게르에서 시작해서 게르에서 익어간다

 

-유목의 시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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